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웨이브에서 콘크리트 마켓을 틀었을 때, 재난 이후 아파트 하나에서 벌어지는 세력 싸움이라는 설정이 꽤 그럴싸하게 느껴졌거든요. 비트코인보다 통조림이 더 귀해진 세상, 박 회장이라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마켓, 그리고 그 안으로 숨어드는 주인공 히로. 보면서 "이거 제대로 파고들면 꽤 재밌겠다" 싶었는데, 끝까지 보고 나서는 조금 다른 감상이 남았습니다.
통조림이 화폐가 된 세계, 설정은 탄탄한데
직접 겪어보니,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가 국내 드라마에서 제대로 구현된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포스트아포칼립스란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장르를 말하는데, 콘크리트 마켓은 이 설정을 꽤 현실감 있게 끌어왔습니다. 대지진으로 세상이 무너지고 기존의 법과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 통조림이라는 새로운 교환 수단이 들어선 것이죠.
경제학 용어로 이걸 물물교환 경제(barter economy)라고 부릅니다. 물물교환 경제란 법정통화 없이 재화와 재화를 직접 교환하는 시스템으로, 역사적으로 화폐가 발명되기 이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콘크리트 마켓은 이 시스템을 통조림이라는 단일 기준재로 표준화한 셈인데, 설정 자체는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서 가장 먼저 의아했던 건 공급 문제였습니다. 드라마 내내 런천미트가 넘쳐나는데, 지진 나서 세상 망한 지 꽤 된 시점에 그 물량이 어디서 계속 나오는지 설명이 전혀 없었습니다. 902호에 런천미트 공장이라도 돌리지 않는 이상, 저 인구를 먹일 통조림을 어디서 구해오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계란프라이나 스테이크 생고기가 멀쩡히 등장할 때는 진짜 잠깐 현실 감각을 잃었습니다.
콘크리트 마켓의 경제 구조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통조림: 유일한 교환 수단이자 생존의 기본 단위
- 약품·연료: 희소 자원으로 고부가가치 교환 품목
- 정보: 히로가 활용하는 비가시적 권력 자원
- 물: 후반부 핵심 갈등의 원인이 되는 공공재
줄거리 : 히로의 생존 전략, 리스크 헤징의 교과서
제 경험상 이런 장르에서 주인공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정보 비대칭을 이용할 때입니다.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이란 거래 당사자 중 한쪽이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상태를 뜻하는데,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 애컬로프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히로는 이 구조를 본능적으로 활용합니다.
장마를 예측해 고체 연료와 기름 가격을 세 배로 올리자고 제안한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상술이 아니라 리스크 헤징(risk hedging) 전략에 가깝습니다. 리스크 헤징이란 미래의 불확실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사전에 반대 포지션을 취하는 방식으로, 금융 시장에서는 선물 계약이나 옵션으로 구현됩니다. 히로는 날씨라는 자연 변수를 읽고 재고를 미리 확보한 셈이죠. 그 계획이 적중하면서 통조림이 10배로 불어나는 장면은 드라마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박 회장이 히로를 투락치로 영입하려는 장면도 흥미로웠습니다. 박 회장은 히로의 심장약이라는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도, 동시에 그 능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이건 전형적인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입니다. 여기서 주인-대리인 문제란 위임자와 수임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갈등 구조를 말하는데, 박 회장과 히로의 관계가 정확히 이 구도입니다. 박 회장은 히로를 통제하려 하고, 히로는 그 안에서 자기 목적을 숨기고 있으니까요.
세력 심리전, 아쉬움이 남는 이유
제가 직접 끝까지 다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스토리가 너무 얕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히로, 태진, 철민, 박 회장 네 세력이 얽히는 구조는 분명히 잘 짜여 있었는데, 각 세력의 심리전과 작전을 좀 더 치밀하고 디테일하게 그렸으면 훨씬 재밌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습니다.
태진이 박 회장에게 진 빚, 철민이 품은 야심, 히로가 세정의 죽음에서 느낀 복수심. 이 세 축이 충분히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켰다면 꽤 긴장감 있는 심리전 드라마가 됐을 텐데, 실제로는 히로의 계획이 너무 깔끔하게 굴러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극적 긴장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서사 밀도(narrative density)가 아쉬웠다고 할까요.
내러티브 연구에서 갈등 구조가 복잡할수록 몰입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사실입니다. 세 세력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는 설정 자체는 훌륭한데, 그 과정이 너무 빨리, 너무 쉽게 해소되어 버렸습니다. 히로가 철민에게 제시한 세 가지 조건도, 태진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계획도, 시청자 입장에서는 긴장할 틈도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자들의 반란 같은 연출은 개인적으로 좀 뜬금없었습니다. 히로의 캐릭터가 머리 좋고 처세에 강한 인물로 일관되게 설정됐는데, 결말부에서 그 흐름이 갑자기 끊기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영화적 허용이라고 봐야 하는 부분들도 꽤 있었는데, 남주 패거리 머리 스타일 같은 건 그냥 웃고 넘기는 게 마음 편합니다.
결국 킬링타임용, 그 이상을 기대했다면
콘크리트 마켓의 설정은 분명히 매력적입니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분배되는 방식, 통조림이라는 단순한 재화가 화폐 기능을 흡수하는 과정, 생존을 위해 적과 아군을 동시에 속여야 하는 히로의 처지. 이 모든 요소가 제대로 맞물렸다면 꽤 묵직한 작품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느낀 건, 이 드라마가 설정의 잠재력을 절반쯤만 썼다는 겁니다. 꼭대기 세력을 잡아가는 과정이 너무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됐고, 세계관의 논리적 허점도 군데군데 눈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히 볼 만합니다. 히로가 다음엔 어떤 수를 쓸까 궁금해서 손을 놓기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요. 웨이브에서 부담 없이 한 번 훑어보시고, 세력 싸움의 디테일보다는 히로의 순간순간 판단에 집중하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DIX_kV1iKs, https://www.youtube.com/watch?v=U1RAyOhaA9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