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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신분의식, 실학정신, 총평)

by countonfire 2026. 5. 26.

솔직히 이준익 감독 영화라고 해서 기대는 했는데, 막상 보고 나서 예상 밖이었습니다. 정약전과 창대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스승과 제자, 혹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도가 아니었거든요. 사극에서 으레 등장하는 뻔한 신분 구도를 이렇게까지 비틀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신분의식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

기존 사극에서 양반 캐릭터는 대개 허례허식과 탁상공론의 대명사로 그려지고, 반대로 서민 캐릭터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그 공식이 너무 익숙해서, 처음에는 이 영화도 그런 이분법적 구성을 따를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반대입니다. 정약전은 양반이지만 흑산도의 바닷물 속 생물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창대의 배에 올라타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반면 창대는 천민 출신이지만 출세를 꿈꾸고, 유교적 신분질서 안에서 벼슬을 통해 선정을 펼치려는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역할 전환은 사극에서 정말 드문 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정약전은 당대 기준으로 분명 깨어 있는 인물입니다. 천주교적 평등관을 내면화하고 있고, 가거댁에게 남성 중심적 시선을 지적받은 뒤 스스로의 편견을 인정할 만큼 유연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창대를 향해 무심코 "상놈"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태생적 이데올로기(Innate Ideology)라는 개념이 작동합니다. 태생적 이데올로기란 개인이 의식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태어나고 자란 사회 구조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정약전의 "상놈" 발언은 창대를 인격적으로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 자체가 성리학적 신분관념에서 비롯된 것이고, 정약전조차 그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장치로 읽힙니다.

흥미로운 건 창대 쪽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신분제 안에 갇혀 있습니다. 정약전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정약용의 제자에게 시로 맞받아치며 자존심을 세웁니다. 스승에게도 왜 동생(정약용)처럼 품위 있는 학술서를 쓰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창대의 유교적 이상은 영화 중반까지 굳건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창대가 오히려 더 전통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두 인물이 보여주는 핵심 대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약전: 상류층 출신, 탈성리학적 세계관, 그러나 무의식적 신분 언어에서 자유롭지 못함
  • 창대: 하층민 출신, 유교적 신분질서 안에서 출세를 꿈꾸는 이상주의자
  • 두 사람 모두: 시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적 한계를 공유함

이처럼 영화는 어느 한쪽을 선인, 다른 한쪽을 악인으로 정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시각에서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는데, 저는 이 지점이 이준익 감독의 역사 해석 방식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실학정신과 정약전이 남긴 것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썼다면, 흑산도의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남겼습니다. 목민심서는 관료 시스템 내부의 개혁론을 담은 행정 지침서인 반면, 자산어보는 어류와 해양 생물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박물학적 인문서입니다. 두 저작 모두 실학(實學)의 범주 안에 있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여기서 실학이란 조선 후기에 등장한 학문 사조로, 공리공론 중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현실에 유용한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정약용이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고민했다면, 정약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외향적인 탐구를 선택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두 형제의 학문 방향 차이를 영화만큼 명쾌하게 대비시킨 콘텐츠는 많지 않았습니다.

정약전은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글로만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 뜀박질하고 바닷속을 들여다보고 창대의 경험적 지식을 거래합니다. "홍어 길은 홍어가 안다"는 그의 깨달음은 바로 그 실천적 탐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화에서 설경구가 그 내면을 아주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반면 창대는 육지로 나간 뒤 혹독한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가 배운 유교적 이상은 가혹한 세금 수탈과 백성들의 비참한 삶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여기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경세치용이란 실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학문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실제로 쓰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리킵니다. 창대가 육지에서 배운 것은 책 속의 경세치용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야만 아는 현실이었던 셈입니다.

또 하나, 이 영화의 흑백 영상 처리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직도 의문이 남습니다. 어두운 시대상을 담아내려는 연출적 의도라고 이해하면서도, 흑산도의 바다와 자연을 컬러로 봤을 때 얼마나 다른 감흥을 줬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흑백 영상미(Black-and-White Cinematography)는 색채 정보를 제거함으로써 감정의 질감을 오히려 농밀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흑백 시네마토그래피란 색 재현 없이 명암 대비만으로 서사의 분위기를 조율하는 촬영 방식을 말합니다. 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갑갑하다는 첫인상은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남았습니다.

영화 내러티브 연구 관점에서, 서사 구조와 캐릭터 아크의 설계 방식이 관객의 몰입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출처: 한국영화아카데미). 이 영화에서 정약전과 창대의 사상적 대립이 스승의 죽음을 기점으로 수렴하는 구조는 그 측면에서 잘 설계된 편입니다. "흑산이 아니라 자산"이라는 창대의 마지막 대사가 두 사람의 합일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결말을 설명하지 않고 행동과 언어로 보여줍니다.

이준익 감독이 사극에서 위인을 우상화하지 않고 그 시대를 함께 살아낸 평범한 인물들의 가치를 조명한다는 점은 여러 평론에서도 지적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저도 그 방향성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총평

사극을 자주 보지 않는 분들도 이 영화는 한 번쯤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단, 화려한 액션이나 복잡한 궁중 정치극을 기대하면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이 대화하고 부딪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복잡한 세상에 지쳐 있을 때, 섬 하나에 갇혀 물고기나 들여다보며 사는 게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탐구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 이 영화의 가장 조용한 울림이라고 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W8nr6-Uzwk&list=PLISvJ8Fu1B4dgWe8dL9K83w0D5Qmb7_ra&index=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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