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첫 우디 앨런 영화치고 '이레셔널 맨'이 입문작으로 최선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없지는 않았는데, 뭔가 손에 꽉 잡히는 느낌이 없었달까요. 그 찜찜함이 리뷰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철학과 교수 에이브, 왜 이 캐릭터가 불편한가
영화는 삶의 의지를 잃은 철학과 교수 에이브 루카스가 시골 대학에 부임하면서 시작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런 유형의 캐릭터는 처음엔 '지적인 염세주의자'처럼 멋있어 보이다가 점점 불편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이브가 딱 그랬습니다.
에이브는 택시 운전, 건물 잡일, 엘리베이터 운전 같은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지만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인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영화가 활용하는 것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철학적 개념입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먼저 존재한 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는 사상으로, 사르트르와 카뮈가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에이브는 바로 이 실존주의의 위기 상태, 즉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허무(Nihilism) 상태로 등장합니다. 허무주의란 삶에 본질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상으로, 니체가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런 에이브가 식당에서 우연히 엿들은 한 마디, "저 판사가 심장마비라도 걸렸으면"이라는 말 한마디에 삶의 불씨를 되찾는다는 설정이 이 영화의 핵심 아이러니입니다. 인문학적 고뇌로 가득한 교수가 살인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발상, 저는 그 지점이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역할을 위해 15kg 정도 몸을 불리며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들었습니다. '글래디에이터'의 코모두스, '그녀'의 테오도르, '더 마스터'의 프레디까지 봐온 입장에서, 이번 에이브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소름 돋는 연기였습니다. 상대역 엠마 스톤 역시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에게 감정이 기우는 제자 질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스토리 : 완벽한 범죄 계획,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그림자
에이브가 스팽글러 판사를 독살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의도적으로 오마주 하고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습니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나는 선택받은 자이므로 살인도 정당화된다"는 초인간론(Übermensch)적 논리로 범죄를 합리화하듯, 에이브 역시 자신의 행동을 '세상의 암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납득시킵니다. 초인간론이란 니체 철학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탁월한 개인은 일반적인 도덕규범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류의 철학적 자기합리화는 실제로 꽤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에이브가 청산가리 대신 비소를 선택하고, 판사의 조깅 루틴과 오렌지 주스 습관까지 세밀하게 조사하는 장면들은 섬뜩하리만큼 치밀합니다. 살인 계획의 디테일이 구체적으로 묘사될수록, 관객은 어느새 에이브의 논리에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이 영화의 교묘한 장치입니다.
판사가 사망하고 무고한 페데스트라가 용의자로 지목되자, 에이브의 내부 논리는 또 한 번 작동합니다. 자수를 고민하면서도 결국 살아남으려는 본능 앞에 무릎 꿇고,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또 다른 인물까지 제거하려 합니다. 인문학에 깊이 빠진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지식인의 도덕적 붕괴를 촘촘하게 추적하는 영화였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에이브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의 행동과 가치관이 충돌할 때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논리를 왜곡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에이브가 살인을 '선행'으로 포장하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장면들이 모두 이 메커니즘으로 설명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충분히 연구된 개념인 만큼, 영화가 캐릭터의 내면을 얼마나 정밀하게 설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에이브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실존주의적 공허함에서 출발해 살인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역설적 구조
-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와 유사한 초인간론적 자기 합리화
- 인지 부조화가 반복되며 도덕적 감각이 점차 마비되는 과정
- 엘리베이터 앞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의 허무함
결말의 허무함, 그게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꽤 갑작스럽습니다. 반전이 나오는 순간, 마치 누가 갑자기 전원을 꺼버린 것처럼 영화가 끝납니다. 주요 변수로 작용하던 요소들이 어떻게 정리됐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좀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력을 다해 허우적거리다 허무하게 추락하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면, 오히려 그게 가장 현실에 가까운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큰 소리도, 긴 과정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것. 그 충격과 여운은 에이브를 바라보던 제자 질에게처럼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남습니다.
철학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 철학에 갇혀버린 사람의 이야기. 허무와 염세에 빠져 있다가 스스로 히어로가 됐다고 착각하고, 완전 범죄를 꿈꿨는데 제 발등을 찍은 꼴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19세기에 이미 해부했던 이 주제를 우디 앨런은 21세기 미국 캠퍼스로 옮겨왔고, 그 조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학 비평 분야에서도 '죄와 벌'의 초인간론적 서사는 현대 영화와의 연관성이 꾸준히 논의되는 주제입니다.
우디 앨런 영화에 이미 익숙한 분들이나 호아킨 피닉스의 팬이라면 충분히 볼 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입문용으로는 글쎄요, 저처럼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조금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죄와 벌'을 먼저 읽어보신다면, 분명 훨씬 더 다른 층위로 이 영화가 보일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O-N82Gaifg, https://www.youtube.com/watch?v=ot8ijV_K3gw